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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강풍이 거칠게 불어대는 황무지의 동굴 속에서 나흘째 아침을 맞아, 3명의 사망자와 9명의 남자, 11명의 여자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유일한 희망인 폴라 퀸 호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격리된 남극의 미개척지를 탐험하려고 희희낙락하며 상륙한 땅이었는데, 이제 관광객들은 방치된 채로 절망으로 가득 찬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메이브의 참담한 심정은 휴대용 무전기의 전지가 바닥을 드러냄에 따라 한층 더 우울해졌다.
인제 와서는 동굴 속의 가혹한 환경 때문에 일행 중의 고령자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메이브는 잘 알고 있었다. 온대나 열대지방에서 살아오는 사람들에게 남극의 얼어붙을 정도로 가혹한 기후는 잔혹한 시련이었다. 젊고 튼튼한 육체의 소유주라면 언젠가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고령자들에게는 20대나 30대 같은 체력이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육체는 전체적으로 약해졌고 상처 입기 쉬웠다.
처음에는 모두 농담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에게 닥친 시련을 예상외의 모험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였다. 노래도 불렀다. 주로 부른 노래는 ‘왈칭 마틸다’였고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무기력이 모두를 엄습했다. 전원이 침묵을 지키면서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두 기특하게도 불평 하나 늘어놓지 않고 고통을 견뎌냈다.
인제 와서는 굶주림 덕분에 ‘고기가 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메이브는 결국 자신의 의지를 꺾고 죽은 펭귄을 몇 마리 갖고 오라고 오스트레일리아인 사업가 두 명을 보냈다.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은 셈이다. 죽은 직후에 얼어붙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펭귄이 부패했을 것이라는 우려는 전혀 없었다. 파견한 남성 중 한 명은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그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꺼내어 교묘하게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냈다. 단백질과 지방으로 배를 채우고 열원도 보충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브는 포경 오두막 중 하나에서 70년 이상이나 묵은 홍차를 발견했다. 낡은 홍차 포트와 평평한 냄비도 무단으로 빌려왔다. 그리고 나무통에서 남은 고래기름을 1리터 정도 따라서 냄비에 넣고 불을 지폈다. 푸른 불길이 한 가닥 피어오르자, 쓸만한 스토브를 만들어낸 그녀의 창의력에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서 낡은 포트를 깨끗이 닦은 다음 눈을 가득 넣고 차를 끓였다. 배를 채우고 열기를 확보함에 따라 모두의 기분도 얼마간 밝아졌지만, 그것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곧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다시 동굴 안을 지배했다. 죽을쏘냐 하고 버티려던 결의가 혹한에 침식되어 점점 약해졌다.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라고 모두가 믿기 시작했다. 모선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구조대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은 환상이나 다름없었다.
인제 와서는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든지, 아니면 펭귄의 목숨을 빼앗아 간 병으로 죽든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영하의 기온에서 영구적으로 버틸 수 있는 복장을 한 사람은 없었다. 고래기름을 좀 더 때고 싶어도 질식사할 위험이 훨씬 컸다. 냄비에 담긴 기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위안밖에는 될 수 없는 불꽃이어서 몸을 덥히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냉기가 죽음의 촉수를 뻗어서 그들 모두를 감싸고 말 것이다.
바깥에서는 폭풍이 점점 더 거칠어지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의 남극대륙에서는 드문 일이다. 돌풍이 점점 강해져서 우연히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박살 냈다. 고령자 중에서 4명은 혹독한 기후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메이브로서는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얼어붙는 손가락을 통해 실의를 맛보았다. 이미 죽은 세 사람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메이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남자들조차도 그녀의 권한을 존중했으며 아무런 질문 없이 그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주여, 부디 모두를 구해주십시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제가 더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저들이 모르게 해주세요.”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절망감에 떨었다. 무력감이 한층 가혹하게 파고들었다. 끔찍한 심판의 결말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물이나 되는 인명을 계속해서 두 어깨에 짊어지고 버틸 정도의 체력이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더 발버둥을 치고 싶은 기력도 없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녀의 귀에 바람의 울부짖음과는 다른 기묘한 소리가 잠깐 들렸다. 무엇인지 공기를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였지만 이윽고 그것도 끊어지고 말았다. 기분 탓이겠지, 하고 메이브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바람 방향이 바뀐 덕분에 터널 입구의 공기구멍을 통과하는 바람이 밴시의 비명과는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리라.
또다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라졌다. 메이브는 일단 일어나서 비틀거리면서 터널을 걸어갔다. 입구의 바람막이 턱에는 눈이 불어 와서 쌓였고 작은 공기구멍은 거의 눈에 묻혔다. 돌을 몇 개 들어내고 통로를 확보한 다음 바람과 눈이 기다리는 혹한의 세계로 비틀거리며 걸어나갔다. 바람은 시속 35킬로미터 정도로 거칠게 불어왔고, 눈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허공에서 흩날렸다. 돌연 메이브는 몸을 굳히면서 난무하는 눈의 장막 너머로 시선을 고정했다.
전방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는 막연했고 실물로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하늘로부터 하늘거리면서 내려와서 사방을 덮은 불투명한 베일보다는 한결 진한 색깔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 메이브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 드러누운 채,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은 강렬했다. 하지만, 생명의 불꽃은 희미하게 꺼질 것을 거부했다.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나서 흔들리는 불빛 속을 걸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일단 쳐다보긴 했지만, 곧 그것은 불어 닥치는 눈보라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꽤 가까웠다. 다음 순간 메이브의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그것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긴 했지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메이브는 흥분해서 손을 휘저었다. 상대는 귀를 기울이는 듯 잠시 멈추었지만, 곧 방향을 바꾸어 떠나려고 했다.
이번에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만이 낼 수 있는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다. 그림자는 뒤를 돌아보고는 가로막는 눈보라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메이브는 미친 사람처럼 양손을 휘저었다. 상대방도 손을 저어서 대답하고는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제발 저 사람이 신기루나 환각이 아니길.”
메이브는 하늘에 빌었다.
이윽고 남자는 메이브의 옆에 쌓인 눈을 헤치고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평생 본 중에서 가장 크고 늠름한 팔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틀림없이 와주실 걸로 믿고 있었어요.”
상대방은 키가 큰 남자로 청록색 파카를 입었으며 왼쪽 가슴에 NUMA(국립해중해양기관)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고글을 벗더니 놀라움과 당혹감이 섞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녹색 눈동자로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햇볕에 잘 그을린 얼굴은 혹한의 남극에서 묘한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겁니까?”
남자는 걱정스럽다는 듯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뒤의 동굴에 20명이 있어요. 우리는 해안을 구경하러 왔었어요. 그런데 크루저가 떠나버리고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배에서 버림받았단 말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풍을 불안한 듯 보았다.
“세계적인 참사라도 발생한 건가요?”
남자는 그녀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리 일행 중 세 사람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거든요. 게다가 만의 북쪽에 있는 펭귄의 집단번식지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해 버렸어요.”
의문의 남자는 비극적인 소식에 깜짝 놀랄 만도 하건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메이브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눈보라기 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미국인이시죠?”
메이브는 추위에 떨면서 물었다.
“그리고 당신은 오스트레일리아 인이로군요.”
“그렇게 표시가 나나요?”
“a를 i처럼 발음하는 것으로 봐서.”
메이브는 장갑을 낀 손 한쪽을 내밀었다.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실 걸요, 미스터…?”
“더크 피트라고 합니다.”
“메이브 프레처입니다.”
남자는 메이브가 거부하는 것을 무시하고 안아 올리더니 눈에 새겨진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터널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 이야기는 춥지 않은 곳에서 하도록 하죠. 달리 20명이 더 있다고 하셨죠?”
“모두 아직 살아 있어요.”
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전 팸플릿은 항해에 대해서 과장되게 홍보하는 경향이 있죠.”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피트는 메이브를 내려놓고 자신의 스키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 색이었고 뒤엉켜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굵고 까만 눈썹 아래서 메이브를 주시했다. 얼굴은 윤곽이 뚜렷했고 야외생활이 긴 탓인지 비바람에 단련되어 거칠어 보이긴 해도 꽤 핸섬하다. 입가는 항상 미소를 머금은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사람은 여성에게 안도감을 주는 타입의 남자다라고 메이브는 생각했다.
곧 피트는 관광객들로부터 풋볼팀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 못지않은 환대를 받았다. 생전 보지도 못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는 사실에 관광객들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혹한 시련을 받은 것치고는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사실에 피트는 놀랐다. 나이 든 여성들은 모두 마치 아들을 보는 것처럼 피트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남자들이 열심히 등을 두들겨댔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플 지경이었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열고는 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메이브는 그를 소개하고 돌풍 속에서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오?”
그들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질문이었다.
“NUMA의 조사선에서 왔습니다. 이 근처 바다에서 바다표범과 돌고래가 엄청난 속도로 모습을 감추는 현상이 발생해서, 그 원인을 조사하려고 탐사하는 중입니다. 헬기로 시모아 섬 상공을 비행하는 도중에 눈보라가 닥쳐와서 일단 상륙한 다음 지나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동료도 있소?”
“기내에 파일럿과 생물학자 한 명이 남아 있습니다. 조디악으로 보이는 물체를 제가 발견했습니다. 이 섬의 무인지역에 어째서 보트가 놓여 있는지 수상하게 생각해서 일단 조사해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다 미스 프레처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밖으로 나가 볼 생각이 다 들었수?”
막 증조모가 된 83세의 노파가 메이브에게 말했다.
“바깥바람 소리에 섞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 착륙하는 헬기 소리였던 모양이에요.”
“블리자드가 이렇게 불어대는 와중에 접촉할 수 있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았어요.”
피트의 말이다.
“실제로 들으면서도 설마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바람이 장난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장막 안에서 당신이 손을 흔들고 있더군요.”
“조사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메이브가 물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40킬로미터 지점입니다.”
“혹시 우리 모선인 폴라 퀸 호하고 스쳐 지나진 않았나요?”
피트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1주일 이상이나 다른 배는 구경도 못했습니다.”
“무선 연락도 없던가요?”
메이브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구조신호라도.”
“핼리 만에 있는 영국 기지로 보급하려고 가는 배하고는 교신했지만, 크루저에서 연락을 받은 적은 없어요.”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남자 중 한 명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승무원 전원과 우리 승객들도 타고 있었으니까요.”
“의문스러운 사항은 여러분 모두를 일단 우리 조사선에 수용하고 나면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죠. 폴라 퀸 호 정도로 호화롭진 않지만, 꽤 괜찮은 객실에 우수한 의사가 있고, 최고의 와인 재고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요리사도 있습니다.”
“여기서 1분이라도 더 냉동고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게 낫겠군.”
호리호리하긴 해도 근육질인 뉴질랜드의 목장주가 그렇게 말하면서 목청 높여 웃었다.
“헬기는 한 번에 5,6명 밖에는 못 타니까 몇 번 왕복해야 할 겁니다.”
피트가 설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300미터쯤 되는 곳에 착륙했으니까 일단 제가 돌아가서 동굴 근처까지 유도해 오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굳이 차가운 눈보라 속을 걷지 않아도 되겠죠.”
“너무 친절하세요.”
메이브는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같이 가도 될까요?”
“가보시겠어요?”
메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도 저한테 명령을 받지 않아서 모두 기뻐할 걸요.”
알 조르디노는 NUMA가 보유한 청록색 헬기의 조종석에 앉아서 크로스 워드 퍼즐을 풀고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덩치는 맥주통에 발이 달려서 서 있는 듯 단단했고, 좌우 팔뚝은 기중기 같았다. 때때로 새까만 눈동자를 들어 조종석의 방풍유리 너머에서 몰아치는 눈발을 주시했고, 피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다시 퍼즐에 주의를 집중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곱슬거렸고 입가에 항상 떠도는 냉소적인 표정은 세상 사람을 모두 회의적으로 본다는 인상을 풍겼다. 코는 로마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어릴 적부터 더크 피트의 친구이며 같이 입대했던 공군에서도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윽고 둘은 국립해중해양기관이 발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임시직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벌써 14년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여섯 글자인데, 악취를 내뿜는 식물을 먹고, 가는 털로 뒤덮인 멍청한 동물은 뭐지?”
조르디노는 등 뒤의, 테스트 장치로 가득 찬 화물칸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NUMA의 해양생물학자로 수집을 끝낸 표본에서 막 고개를 들었다. 의심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가는 털에 덮인 멍청한 동물이라는 게 있을 리가 있나?”
“정말? 여기 그렇게 적혀있는데도?”
로이 밴 프리트는 조르디노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석 달이나 같이 바다 위에서 생활하는 동안 충분히 똑똑해졌기 때문에 땅딸막한 이탈리아 인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도 사라졌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몽골의 하늘을 나르는 늘보가 있었군. ‘slobbo’는 어때, 딱 들어맞지 않나?”
장난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르디노는 퍼즐에서 고개를 들고는 계속 내리는 눈보라를 쳐다보았다.
“더크 녀석, 슬슬 돌아와야 할 때가 됐는데.”
“조사하러 나간 지 얼마나 됐지?”
밴 프리트가 물었다.
“45분 정도.”
흐릿한 그림자 두 개가 멀리서 나타난 것을 보고 조르디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돌아오는 모양인데.”
그리고 덧붙였다.
“조금 전에 먹었던 치즈 샌드위치에 환각제라도 들어가 있었던 모양인데. 저 친구, 누굴 데리고 오고 있잖아.”
“그럴 리가 있나. 인근 30킬로미터 이내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여기 와서 직접 보란 말이야.”
밴 프리트가 표본수집용의 주둥이가 넓은 병에 뚜껑을 닫고 나무 상자에 넣었을 때, 이미 피트는 승객용 해치를 열고 뒤를 따라온 메이브 프레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렌지 색 재킷의 후드를 벗고는 긴 블론드를 쓸어내린 다음 환하게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상상도 못하셨겠지만,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요.”
밴 프리트는 예수의 부활을 눈앞에서 직접 본 표정이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다. 반면 조르디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딱히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중얼거렸다.
“더크 피트 이외에 대체 누가 남극의 무인도에서 몰아치는 블리자드를 뚫고 나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데리고 올 수 있단 말이야?”





덧글
루드라 2008/09/17 21:00 # 답글
감사! 감사! 거짓말 아니고 요즘 진짜로 이거 보는 재미로 인터넷 접속하고 있습니다.